'이율배반' 이란 사실 꽤나 친숙하게 알고 있는 내용으로써, 이런 거다.
나는 외딴섬에 갔다가 식인종에게 잡혔다. 식인종은 나에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을 하게 해줬는데, 그 말이 거짓일 경우 물고기 밥이 되도록 나를 바다에 던져버리고, 참일 경우 자신들이 만찬으로써 먹겠다고 한다. 나는 살기 위해서 "나는 거짓만을 말한다." 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그 상황에 그렇게 머릴 굴릴 수 있을지가 의문이라면, 이 내용을 이제 배웠으니 당신도 그 상황에서 그렇게 말할 수가 있다.) 이 말이 참인 경우 나는 거짓말쟁이가 되어 다시 거짓말쟁이가 아닌 것이 되므로 거짓이 되고, 혹은 이 말이 거짓이라면 나는 거짓말쟁이가 아닌 것이 되므로 결국 거짓말쟁이가 되어 참이 된다. 참 또는 거짓에 대한 식인종의 판단 자체가 본디 명제를 뒤집게 되므로 참과 거짓의 두 개 명제가 양립되면서 모순이 생기게 되는데, 바로 이것이 이율배반이다.
외딴섬에 갔더니 불현듯 그 소설가의 문학적 지향점이 떠올랐다. 모순에 빠지지 않으려면 섬에 가질 말아야겠는데, 그 소설가는 왜 그걸 지향씩이나 했던 걸까. 그건 아마도 내가 외딴섬에 가려고 간 게 아니라 풍랑을 만나 운명처럼 빠져들 수밖에 없었기 때문인 거다. 그렇다면 풍랑은 어떻게 피하지? 배는 처음부터 안 탈 수 있는 걸까? 그런데 이미 늦었다. 나는 살기 위해 배워놨던 말로써 정체성을 파괴할지, 아니면 당장 사무치는 말을 남기고 장렬히 죽어버릴지를 생각하고 있으니까. 여기서 살아나가봐야 다음에 또 그럴 꺼다. 그 소설가가 추구했던 문학적 소재는 바로 사랑이었다는 걸 이제 알겠다.
나라는 정체성은 기호로 대변되어왔거나 혹은 그렇게 시도되어왔었는데, 거슬러 생각해보니 그것의 기표는 항상 바뀌었고, 기의는 그대로였던 것처럼 착각하며 살았던 것 같다. '나'를 지키고자 했던 나는 정작 내가 무슨 뜻인지를 모르게 되어간다. 나를 찾고 지키겠다는 것이 차라리 바보라는 정체성을 내걸고 무심해지는 것만도 못하다는 생각이다.
당분간 기호적 시도를 중단하겠다. 일단 얼마나 편안해지는지 보고서 돌아오지 말자는 생각이 들만큼, 나는 피곤해졌다. 다음달에는 어떤 피아니스트의 공연과 달리기 행사가 나를 귀찮게 할 것 같고, 그 다음달과 또 그 다음달에는 지향점을 잘 모르겠으나 정체성의 혼란보다는 구체적일 것 같은 시험들에 들도록 나는 프로그래밍되어있다. 그것들이 끝나면 한동안 읽지 못했던, 그리고 궁금해서 날 조급하게 만들 것 같아 눈길조차 주지 않았던 신간 소설들을 읽고 싶다. 그 후엔 그냥 증발할지, 준법의 범위에서 미움을 해소하고 떠날지를 재밌게 고민하게 되거나, 혹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계속 딸딸이 같은 자괴에 빠져있게 될지도... 그땐 아마 외로워서라도 휴가에서 돌아올 꺼다.
디어 헤븐, 다시 태어나면 나만 사랑하면 되는 아메바, 플리즈.